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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대륙 한가운데서 무더기로 발견된 고구려 유물

중국대륙 한가운데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
고구려의 영토는 산서성, 하남성, 산동성, 하북성까지였음을 유물로 입증
 
역사복원신문 기사입력 2011/08/29 [11:11]
(MBC 뉴스 동영상) http://imnews.imbc.com//replay/nwtoday/article/2907415_5782.html

중국대륙 한가운데인 산서성, 하남성, 산동성, 하북성 등지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는 곳이 있어 눈길을 끈다. 중국 요녕성 대련시 영성자촌에 위치한 고려박물관(高麗博物館)이 그곳이다. 이 지역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은 한번쯤 들러 대륙에서 꽃피웠던 고(구)려의 찬란한 문물을 느껴봄이 어떨는가?

 

 
 

 

 

중국대륙 한가운데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

(MBC 뉴스 동영상) http://imnews.imbc.com//replay/nwtoday/article/2907415_5782.html

중국대륙 한가운데인 산서성, 하남성, 산동성, 하북성 등지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는 곳이 있어 눈길을 끈다. 중국 요녕성 대련시 영성자촌에 위치한 고려박물관(高麗博物館)이 그곳이다. 이 지역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은 한번쯤 들러 대륙에서 꽃피웠던 고(구)려의 찬란한 문물을 느껴봄이 어떨는지?







아래는 동북삼성 주요신문(흑룡강신문, 료녕신문)에 실린 관련기사이다.

료녕성 대련영성자민속박물관내에 있는 대련고려박물관이 5월 22일 개관식을 가졌다. 이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고(구)려시기의 문물을 국내에서 전시하는 것이다. 이날 대련시 문화국 책임자, 대련시 조선족지명인사들이 개관식에 참가했다. 

총 3000평방미터의 영성자민속박물관에 자리잡은 고려박물관은 전시면적이 800평방미터로 고려관, 조선관을 비롯해 다섯 개의 전시관이 있는데 무려 2000점의 문물이 전시되어 있다. 

개관식에 참가한 북경 중박아(中博雅)문물감정중심의 주복충주임은 “소장품들은 문물가치와 력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또한 문물들이 국내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은 중한 문화동원(同源)을 말해준다”고 하였다. 

본관의 황희면관장(한국인)은 20년전부터 애호로 고려시기 문물을 소장하기 시작하였다가 후에는 본격적으로 문물발굴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이번에 전시된 문물은 중국에서 발굴한 것이라고 밝혔다.
(http://www.ckywf.com/board/read/m_wenhua/52297) 








고려특별전시관 대련시 영성자민속박물관에 [ 길림신

문 ]
 


5월 22일 대련시 문물국 및 북경중박아(北京中博雅)문물검정센터의 해당 책임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관식을 가졌다. 전시관에는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 가깝게는 100년 전까지의 문물들이 2000여점 진렬되어 있는데 조선관, 민속생활관을 비롯해 5개의 전시관으로 되어있다. 그중에 고려청자와 고려백자, 청자삼본불상,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금동9층탑, 24효 등 진귀한 문물들이 수두룩해 관람자들과 학자들의 관심을 자아냈다. 

특히 전시된 문물을 수장애호가인 황희면(한국인)관장이 중국 각지를 답사하며 발굴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커 주목을 받았다. 그는 1992년 중.한 수교 후 중국에 와 학교를 꾸리고 생활가이드 잡지를 출판하는 등 일에 종사하면서 짬짬이 문물을 모아두기 시작, 장장 20년 동안이나 문물발굴에 정력을 쏟았다. 그 문물을 중국에서 전시하는 목적은 문물을 매개로 중한우의와 교류를 촉진하자는데 있다고 황희면관장은 한마디 덧붙였다. 

개관식에 참가하기 위해 북경에서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북경중박아(北京中博雅)문물검정센터 우복충(牛福忠)주임은 전시관을 돌아본 후 적지 않은 문물들은 처음 보는 것이라고 하면서 력사적 가치와 연구가치가 있다고 관람소감을 털었다.
http://kr.chinajilin.com.cn/sports/content/2011-05/26/content_50809.htm (길림신문)







이런 유물들은 지금의 식민사학의 반도사관으로는 설명


이 되지 않는다.


중국의 유물감정전문가들도 인정했다. 그런데 우리만


아니라고 한다.


 

결론은 "고구려의 강역은 중국대륙 한가운데까지였다."
 













제발 사대식민사관에 찌든 식민빠 놈들은 유물이 몇점이나 발견됬는지 이글이

나 꼼꼼히

읽고 뭐 대영제국에서 조선청자가 발견되면 조선영토라 할기세라는둥 주둥아

리로 이딴 헛소리 짓껄이고

놀리도록!

중국대륙 한가운데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

 

중국대륙 한가운데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
고구려의 영토는 산서성, 하남성, 산동성, 하북성까지였음을 유물로 입증
 
역사복원신문 기사입력 2011/08/29 [11:11]
(MBC 뉴스 동영상) http://imnews.imbc.com//replay/nwtoday/article/2907415_5782.html

중국대륙 한가운데인 산서성, 하남성, 산동성, 하북성 등지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는 곳이 있어 눈길을 끈다. 중국 요녕성 대련시 영성자촌에 위치한 고려박물관(高麗博物館)이 그곳이다. 이 지역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은 한번쯤 들러 대륙에서 꽃피웠던 고(구)려의 찬란한 문물을 느껴봄이 어떨는가?

 

 
 

 

 

중국대륙 한가운데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

(MBC 뉴스 동영상) http://imnews.imbc.com//replay/nwtoday/article/2907415_5782.html

중국대륙 한가운데인 산서성, 하남성, 산동성, 하북성 등지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는 곳이 있어 눈길을 끈다. 중국 요녕성 대련시 영성자촌에 위치한 고려박물관(高麗博物館)이 그곳이다. 이 지역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은 한번쯤 들러 대륙에서 꽃피웠던 고(구)려의 찬란한 문물을 느껴봄이 어떨는지?







아래는 동북삼성 주요신문(흑룡강신문, 료녕신문)에 실린 관련기사이다.

료녕성 대련영성자민속박물관내에 있는 대련고려박물관이 5월 22일 개관식을 가졌다. 이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고(구)려시기의 문물을 국내에서 전시하는 것이다. 이날 대련시 문화국 책임자, 대련시 조선족지명인사들이 개관식에 참가했다. 

총 3000평방미터의 영성자민속박물관에 자리잡은 고려박물관은 전시면적이 800평방미터로 고려관, 조선관을 비롯해 다섯 개의 전시관이 있는데 무려 2000점의 문물이 전시되어 있다. 

개관식에 참가한 북경 중박아(中博雅)문물감정중심의 주복충주임은 “소장품들은 문물가치와 력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또한 문물들이 국내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은 중한 문화동원(同源)을 말해준다”고 하였다. 

본관의 황희면관장(한국인)은 20년전부터 애호로 고려시기 문물을 소장하기 시작하였다가 후에는 본격적으로 문물발굴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이번에 전시된 문물은 중국에서 발굴한 것이라고 밝혔다.
(http://www.ckywf.com/board/read/m_wenhua/52297) 








고려특별전시관 대련시 영성자민속박물관에 [ 길림신문 ] 

5월 22일 대련시 문물국 및 북경중박아(北京中博雅)문물검정센터의 해당 책임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관식을 가졌다. 전시관에는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 가깝게는 100년 전까지의 문물들이 2000여점 진렬되어 있는데 조선관, 민속생활관을 비롯해 5개의 전시관으로 되어있다. 그중에 고려청자와 고려백자, 청자삼본불상,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금동9층탑, 24효 등 진귀한 문물들이 수두룩해 관람자들과 학자들의 관심을 자아냈다. 

특히 전시된 문물을 수장애호가인 황희면(한국인)관장이 중국 각지를 답사하며 발굴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커 주목을 받았다. 그는 1992년 중.한 수교 후 중국에 와 학교를 꾸리고 생활가이드 잡지를 출판하는 등 일에 종사하면서 짬짬이 문물을 모아두기 시작, 장장 20년 동안이나 문물발굴에 정력을 쏟았다. 그 문물을 중국에서 전시하는 목적은 문물을 매개로 중한우의와 교류를 촉진하자는데 있다고 황희면관장은 한마디 덧붙였다. 

개관식에 참가하기 위해 북경에서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북경중박아(北京中博雅)문물검정센터 우복충(牛福忠)주임은 전시관을 돌아본 후 적지 않은 문물들은 처음 보는 것이라고 하면서 력사적 가치와 연구가치가 있다고 관람소감을 털었다.
http://kr.chinajilin.com.cn/sports/content/2011-05/26/content_50809.htm (길림신문)







이런 유물들은 지금의 식민사학의 반도사관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중국의 유물감정전문가들도 인정했다. 그런데 우리만 아니라고 한다.

 
결론은 "고구려의 강역은 중국대륙 한가운데까지였다." 





백제멸망의 원흉 웅진성주 예식진



김영관 박사 西安 출토 묘지명 주인공 구명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지난해 중국 뤄양(洛陽) 골동품 상가에 출현한 시안(西安) 출토 백제 유민 묘지명(墓誌銘)의 주인공인 예식진(예<示+爾>寔進)은 660년 신라-당 연합군의 백제 정벌전쟁 때 웅진으로 피신한 백제 의자왕을 포로로 잡아 연합군에 바친 예식(예<示+爾>植)이란 인물임을 밝힌 연구성과가 제출됐다.

백제 부흥운동사 전공인 김영관 박사(서울역사박물관 전시과장)는 최근 발간된 신라사학회(회장 김창겸) 기관지 '신라사학보' 10호에 투고한 '백제유민 예식진 묘지 소개'란 논문에서 묘지명을 통해 최근 존재가 새롭게 부각된 예식진은 구당서(舊唐書) 소정방(蘇定方) 열전에 보이는 백제 대장군 예식과 동일인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식진 묘지명은 중국 지린성(吉林省)사회과학원이 발간하는 격월간 역사고고 전문잡지인 동북사지(東北史地)가 지난해 공개하고 이런 사실을 연합뉴스가 지난 5월31일 베이징발로 보도함으로써 국내에도 존재가 알려졌다.

현재는 행방이 묘연한 이 묘지명에 의하면 예식진은 백제 웅천(熊川.공주) 사람으로 당에서는 좌위위대장군(左威衛大將軍)을 역임했으며 할아버지는 좌평(佐平)까지 오른 예다(藝多), 아버지 역시 좌평을 역임한 사선(思善)이다.

묘지명에는 예식진이 당 고종(高宗) 함형(含亨) 3년(672) 5월25일에 내주(來州) 황현(黃縣)이란 곳에서 58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황제의 명에 의해 같은 해 11월21일 당시 당의 수도인 서안(西安)으로 운구돼 고양원(高陽原)이란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돼있다.

이로 보아 예식진은 백제 무왕(武王) 15년인 615년에 웅진성에서 출생해 660년 백제 멸망 당시에는 46세였다. 묘지명에서는 예식진이 백제에서 어떤 족적을 남겼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으나 여러 기록을 종합할 때 예식임이 틀림없다고 김 박사는 말했다.

구당서 소정방 열전에 의하면 660년 7월, 나당연합군 공세에 밀린 의자왕은 사비도성을 떠나 웅진성으로 달아났다가 같은 달 7월18일에 사비도성으로 와서 연합군에 항복했다.

이 과정에 대해 소정방 열전은 "그(의자왕)의 대장(大將)인 예식이 또한 의자를 데리고 와서 항복하니 태자 륭(隆)과 여러 성주(城主) 전원을 함께 (본국인 당으로) 보냈다"고 묘사했다.

이와 같은 정황을 전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7월)18일에 의자가 태자 및 웅진 방령(熊津方領) 등이 웅진성에서 (사비로) 와서 항복했다"고 적었다.

이 두 기록을 대비할 때, 예식은 백제 멸망 당시 웅진성을 지키는 장관 겸 장군인 웅진방령으로서 의자왕을 잡아 나당 연합군에 바쳤음을 알 수 있다고 김 박사는 주장했다.

김 박사는 묘지명에서 예식진이 "창해(滄海)에서 명성을 드날리고, 청구(靑丘)에서 기개를 떨쳤다"고 하거나 아득한 바다 동쪽에서 황제의 가르침을 펼치고, 보검을 휘두르며 활 시위를 보름달처럼 당겼다는 등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백제 고위 무장이었음은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더불어 이번 묘지명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등지에서 예식(예식진)과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백제 출신 장군으로 등장하는 '백제 사마 예군'(百濟司馬예군<示+爾>軍)이란 문구 중 예군을 '칭군'(稱軍) 혹은 '장군'(將軍)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판독하는 것이 오류임을 명확히 해 준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번 예식진 묘지명은 기존 백제사에서 알려진 소위 '대성 팔족'(大姓八族) 외에도 예식진과 예군이 대표하는 예씨 종족집단이 웅진을 거점으로 대대로 좌평 직을 세습하면서 백제 지배층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확인케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김 박사는 덧붙였다.


즉 한마디로 우리가 아는 의자왕(의자어라하는)

방탕하고 술에취한 폭군이 아니고 총명하고 영특한 군주였으며

삼천궁녀니 의자왕에 대해 나쁜건 신라계 사대주의자 김부식에 의해

철저하게 조작되고 왜곡되고 폄하된것으로 알수있습니다

당시 백제의 지방군은 곳곳에 건재하였고

의자왕은 웅진으로 도망하여 웅진에서 시간을 벌며 반격을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나당연합군은 한곳한곳 점령해가는전술이 아니라 백제영토로 들어와

무조건 사비를 향해 진격하는

방식을 취했기때문에 뒤에는 백제의 지방군들이 건재한상태였구요

따라서 예식진이 의자어라하를 배신만 하지 않았다면 백제로써는

충분히 시간을 벌어서 승산이있는 해볼만한 싸움이었습니다

고구려와 왜의 개입을 기대해볼수도 있구요




고당전쟁 당시 당의 수군을 대파한 연개소문의 여동생 고구려 수군제독 연수영

                                           연수영이 처음 성주로 부임해 수군을 양성한 요동반도 남해안 석성 유적.





우리 역사에는 여왕도 있었다. 또 여왕에 못지않게 권력을 휘두른 태후와 왕비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남자들 못지않게 맹렬히 활약한 여장부도 많았다. 그러면 여성 장군도 있었을까? 대답은 ‘그렇다’다.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따르면 가야시대에는 여성으로만 구성된 여군부대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가야시대 고분에서 투구와 갑옷을 입고 무장한 상태의 여성 시신이 발굴됨에 따라 이를 근거로 여성 군사지휘관의 존재를 추정하게 된 것이다.

 동명성왕 고주몽(高朱蒙)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하고, 나중에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망명해 새 나라를 세운 백제의 국모 소서노(召西努)도 여자의 몸으로 군사를 거느렸으며, 때로는 전투에 앞장섰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정규군 장수도 있었을까? 있었다. 고구려의 연수영(淵秀英)이 바로 그렇다. 그녀는 정규군 장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1300여 년 전 고대에 해군 최고지휘관이었다. 연수영은 다름 아닌 당시 고구려의 최고집권자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누이동생이었다.

 비록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고구려 말기 해군기지가 있던 발해만의 비사성과 석성 등지에서 연수영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비석이 발굴된 것은 근래. 비록 금석문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고구려 말기에 연수영이란 여장군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요녕성 청석관 유적에서 연수영에 관한 비문을 처음 발굴한 사람은 1940년대에 개주 현장을 지낸 신광서라고 하며, 우리나라 학자로는 1995년에 건안성과 청석관 일대 연수영의 유적을 답사하고 비석의 사본 일부를 구해 온 고구려사 연구가인 한민족역사연구소 김금중(錦中) 소장으로 알려졌다. 이어서 당시 고구려연구회 이사장인 서경대 서길수(徐吉洙) 교수, 고구려 해양사를 연구한 동국대 윤명철(尹明喆) 교수 등이 현장을 답사했는데, 현장에 서 있는 것은 중국 측에 의해 새로 세워진 안내판에 불과했다고 한다. 내용도 하나같이 이러저러한 전설이 있다는 식이었다.

 연수영이란 존재를 우리 학계가 주목한 것은 2003년에 중국 측이 청석관 유적지를 유네스코에 등록한 것이 계기였다. 그동안 국내에선 연수영 관련 비문 발굴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다가 유네스코 등록을 계기로 비로소 공론화한 것이다. 현지 전설이나 비문에 고구려와 당의 해전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심지어는 연수영의 사당까지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학계는 아직도 연수영의 존재를 우리나라와 중국의 그 어떤 사서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연수영 관련 유적은 현재 중국의 해군기지가 됐고, 비문 등도 중국정부에서 기밀로 엄중하게 관리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접근할 수 없는 실정이다.

 한편, 중국의 야사인 ‘서곽잡록’과 ‘비망열기’라는 책에도 연수영의 전설이 실려 있다. 연수영의 이름이 연소정 또는 개수영으로 나오는 자료도 있다. 하지만 사서에 나오지 않는다고 엄연한 사실(史實)을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국의 사서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대표적인 정서로 인정하는 ‘삼국사기’에도 수많은 오류가 있지 않은가. 사서의 기록보다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인들의 손으로 새겨진 비문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지금도 고구려의 크고 작은 성들이 있던 요동지방에 가면 여러 곳에 연개소문과 연수영의 전설이 생생하게 서려 있다. 특히 연개소문과 연수영 남매가 머물던 곳에서는 우리 동포 조선족이 아닌 중국인들도 당태종보다 연개소문을 신장(神將)처럼 추앙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연수영은 610년 무렵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일설에는 연수영의 아래로도 연수진이란 여동생이 더 있었다고 전한다. 집안이 대대로 무장을 배출한 만큼 연수영도 어려서부터 무술을 수련했을 것으로 보인다.

연개소문이 비뚤어진 나라를 바로잡고자 혁명을 일으킨 것은 영류왕 25년(642) 9월이었다. 연수영도 오라비가 주도한 이 혁명에 자신이 거느린 낭자군(娘子軍)들을 이끌고 참여했을 것이다.

 연수영이 고구려의 전략적 군사요충인 석성 도사(성주)로 부임한 것은 오빠와 함께 혁명을 일으키고 보장왕을 새 황제로 내세운 직후였다. 연수영이 중앙정계를 떠나 변경의 지방관으로 내려간 이유는 분명치 않다. 연수영이 도사로 있던 석성 소장루에서 발견된 비문 내용을 소개한다. ‘소장루는 연개소문이 자기 누이 개수영(연수영)을 위해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원래 있던 누각은 없어졌고 지금 있는 것은 원래대로 고친 것이다. 연수영은 여자 장수라 다른 장령들과 내성에서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에 홀로 이 누각에서 산 것이다. 개수영은 문예·군략·무예가 뛰어났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으뜸 장수가 됐다. 연수영은 나라를 연 이래로 수군의 장수로는 다른 장수들을 능가해 가장 뛰어났다. 이곳 소장루는 날마다 군무를 처리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연수영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며, 활약상도 주로 642년에서 651년의 10년 정도에 불과하다. 이는 고구려가 당에 멸망했고, 그 시기의 역사는 중국인의 손으로 쓰여 온전한 고구려의 역사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아 있는 명문(銘文)의 편린을 통해서나마 연수영이 남성 못지않게 문무의 재능이 탁월하고, 지략과 리더십이 출중했다는 사실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혁명 이후 중앙의 요직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할까. 자신의 지분(持分)을 포기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혹시 연개소문 (이복)남매 간에 무슨 내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평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적군(당군)이 쳐들어오면 육지보다 바다에서 막아야 한다. 바다는 하늘이 내린 요새이니 이 바다를 지키는 장수가 되고 싶다.” 그래서 그녀는 수군 장수가 됐고, 당나라와 전쟁이 벌어지자 눈부신 활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연수영은 요동반도 남해안 장산군도 지역에 여러 성곽을 개축하고, 전함을 수리 건조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등 수군 양성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것이 643년 무렵. 이에 따라 고구려의 해군력은 이전보다 훨씬 증강하게 됐다.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켜 황제를 바꾸고 최고 권력자가 됐다는 보고를 받은 이세민은 고구려정벌군을 일으켰다. 보장왕 4년(645) 4월에 요하를 건넌 당군은 요동성·개모성·백암성을 점령하고 안시성을 포위했다. 당시 안시성 성주는 지용을 겸비한 출중한 장수 양만춘(楊萬春)이었다.

 그러면 고당전쟁(高唐戰爭)에서 연수영은 어떤 활약을 했던가. 지금까지 알려진 금석문의 기록들을 토대로 살펴본다.

보장왕 1년(642)에 석성도사로 부임한 연수영은 당군의 침략에 대비, 수군의 증강부터 착수했다. 그녀는 5000명의 군사를 수군으로 양성했으며, 70여 척의 전함도 건조했다. 연수영은 실권자 연개소문의 누이동생이라는 후광이 아니라 남자 장수 못지않게 문무에서 탁월한 능력과 비상한 통솔력으로 부하 장졸의 신망을 받았다.

 보장왕 4년(645)에 드디어 당군이 쳐들어왔다. 전쟁이 터지자 연수영은 당군의 수군기지인 창려도로 진격해 적함 100여 척을 불태우고, 곧이어 성산성의 적군을 쳐서 무찌르니 죽은 당군이 2만 명에 이르렀다. 연수영은 이 군공으로 석성도사에서 수군장군 겸 모달로 승진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군사를 이끌고 대흠도와 광록도 등지에서 각각 적선 50여 척을 불사르고 8000여 명의 적군을 죽였다. 하지만 아군은 연수영의 빼어난 군략 덕분에 피해가 거의 없었다.

 잇달아 노백성과 가시포에서도 적선 80여 척을 불태우고 적군 5000여 명을 죽이는 전공을 올렸다. 이 전공으로 연수영은 수군군주로 승진했으며, 본진을 광록도 부근 노백성으로 옮겼다.

 이 시기의 중국 측 사서인 ‘신당서’와 ‘구당서’에 당시의 해전 전황이 거의 백지상태인 것은 연수영에게 당한 참패가 너무나 치욕스러웠기 때문에 이를 은폐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역사가들이 자기네 치욕은 감추고 주변국의 빛나는 역사는 모두 깔아뭉개는 것을 역사서술의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당시 해전에서 적장 설만철은 구사일생으로 달아났고, 전함 200여 척, 군사 1만5000명 이상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연수영의 빛나는 연승 행진은 계속됐다. 창려와 성산 전투에서 적선 100여 척을 격침하고 적군 2만여 명을 죽였으며, 대흠도와 광록도 해전에서도 적선 100여 척을 격침하고 적군 8000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뒀다.

 수군의 연전연패에 대노한 당 태종 이세민은 설만철·구행엄·왕대도 등 수군장수들에게 총공격령을 내렸다. 이에 당군이 가시포와 노백성을 침공했지만 연수영의 고구려 수군에게 전선 80여 척과 군사 5000여 명을 잃고 퇴각했다.

 사학자 서길수, 전영미 박사 등이 연구한 비사성 발굴 비문에는 보장왕 4년 음력 8월 15일에 벌어진 요동반도 남해안 대장산도 해전에서 당군은 1000여 척의 전함에 10만여 대군을 동원했으나 연수영의 고구려 수군에게 대패해 총 군세의 절반인 수백 척의 전함과 3명의 대장을 비롯해 5만여 명의 병력을 잃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지역 전설에 따르면 당시 연수영이 거느린 고구려 수군의 병력은 당군의 5분의 1에 불과한 2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 다음 달에 패전보고를 받은 이세민은 이렇게 소리쳤다고 ‘구당서’는 전한다.

 “적보다 5배나 많은 군사로도 이기지 못했으니 장차 어찌하랴!”

 그 이듬해인 보장왕 5년(646)에는 산동반도 봉래포 해전이 있었다. 당나라 본국을 원정한 이 해전에서도 연수영은 대승을 거뒀고, 그 전공으로 수군원수가 됐다. 그러나 또 해가 바뀐 647년 7월. 이세민은 우진달을 청구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산동성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공격토록 하고, 이세적을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육로로 침공토록 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연수영과 고구려군의 맹렬한 반격에 아무 소득도 없이 패퇴했다. 그 이듬해에도 설만철이 청구도행군대총관이 되어 3만 명을 이끌고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을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의 결사적 응전에 퇴각했다. 연수영은 즉각 보복공격을 가해 적선 수백 척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으나 군비(軍備)가 바닥나는 바람에 부득이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남을 시기하고 모략하는 부류의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연수영의 등에 비수를 박은 사람은 어이없게도 그녀의 둘째 이복오라비 연정토였다. 648년 7월, 연정토 일당의 참소로 연수영은 파직되고 부여성으로 유배당했다. 수군원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연정토였다. 연정토는 수군총수가 되자마자 군공을 탐내 그해 9월에 당의 수군기지인 신성도 협량곡을 공격했다가 참패를 하고 말았다.

 그러자 동생들의 군권 다툼에 노한 연개소문이 연정토를 파면해 옥에 가두고 그의 일당에게 철퇴를 가했다. 그리고 억울하게 귀양살이하던 연수영을 다시 등용해 수군군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고구려는 내분에 휩싸여 국론이 분열되고 국력이 약화된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나라가 망한 것은 예외 없이 내우외환 때문이다. 부국강병과 국리민복을 제쳐둔 채 집안싸움이나 하는 나라는 망한다는 진리를 역사는 교훈으로 일러주고 있다.

 보장왕 19년(660) 8월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그해 12월에도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 소득이 없었다. 보장왕 21년에 당군은 정월부터 또다시 고구려를 침공했다. 머리끝까지 노한 연개소문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해 사수싸움에서 당군 총사령관인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 및 전군을 몰살시키고, 평양을 침공하던 소정방까지 패퇴시켰다.

 연개소문은 보장왕 23년(664)께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58세쯤 됐을 것이다. 맏아들 남생(男生)이 막리지를 세습해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겨우 3년도 안 돼 세 아들이 권력투쟁을 벌여 결국 고구려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보장왕 27년(668), 고구려의 내분을 둘도 없는 호기로 삼은 당은 반역자 남생을 길잡이 삼아 5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설상가상으로 연정토까지 12개 성을 들어 신라에 항복했다. 신라도 20만 대군을 동원해 당군과 합세, 고구려를 공격했다. 남건·남산 등이 죽을 힘을 다해 도성을 지켰지만 이미 때는 늦어 그해 9월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동명성왕이 개국한 대제국 고구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일세의 여걸 연수영의 최후에 관해서는 오고성에서 발굴된 비석이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 개화(開化) 12년 신해 8월 태대형 연정토, 을상 선도해, 대신 계진 등이 태대사자 연수영이 모반을 도모한다고 참소하니 태왕도 연수영이 다른 뜻을 품었다고 의심했다. 태왕이 고심하다가 연수영을 파면했다. 풍문에는 연수영이 반역을 꾀했다는 참소로 사사됐다고도 하고, 전리로 방출돼 행방이 묘연하다고 했다. 나라사람들은 연수영의 무죄를 믿었기에 이를 매우 통탄했다.… -

 이래도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다고 연수영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곤란하다. 중국이 연개소문이나 연수영을 고구려의 인물로 인정해 그들의 숨결과 자취가 서린 청석관과 석성, 비사성 등 유적을 유네스코에 등록할 것으로 보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고구려는 ‘중국 변방의 지방정권’이고, 고구려인은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이라고 역사를 왜곡하고 탈취하기 위해서다. 사정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실증주의의 탈을 쓰고 일제 식민사관과 반도사관 중화 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사학자들과 그들을 맹종하며 절대 진리이고 복음 모든 진실인마냥 떠들며 나와 다른 의견과 가설은 무조건 틀렸다고 떠드는 아마추어 역사인들은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또 아직도 한국사의 영역이 압록강·두만강 이남에 국한된다느니, 이제 민족이란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느니 하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내뱉는 민족적 자존심도 주체성도 없는 일부 사학자가 여전히 강단에서 활개 치는 사실도 참으로 개탄스럽다.


hyjoon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청 경찰청등 국가 사이트에 민원넣엇습니다(내용추가)

보아하니 철모르는 식민사대 반도사관에 찌든 아마추어 고딩같은데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너무좁네요

공공연하게 특정인을 이런곳에서 비방하다니 아마추어새끼가 논파어쩌고 역사에 대해 떠드는것도 웃음이 나오고

쥐뿔도 모르면서 자신의 믿음만이 진리인마냥 설치는것도 우습고 ^^

저 인간의 행위 죄상이 뭔지 법률적 근거를 볼까요?

정보통신법70조(벌칙)

①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사실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②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거짓의 사실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③ 제1항과 제2항의 죄는 피해자가 구체적으로 밝힌 의사에 반하여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


형법307조 명예훼손죄. 그리고 앞서
언급한 정통법 70조 위반죄등이

된다 이겁니다 철부지 저 고딩놈이 명예훼손이 뭔지 잘모르는거같기에

딴사람도 알기쉽게

조금더 쉽게 풀어 설명드리자면 명예훼손이란 공연히 어떤 사실이나 허위사실을 공연성(다수의 사람들이 보거나 듣는등 인지할 수 있고 전파성을 가질수있게 하는 상황)을 띤 글 작성으로 적시하여 그 타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입니다.

명예훼손이 되려면 누구의 이야기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냥 "갑돌이"라고 한다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모르므로 상대가 특정이 되지 않아 처벌이 되지 않습니다.그러므로 신상

정보를 공개를 하는것은 그 상대를 특정지을수 있는 정보이므로 본죄가 성립이 될 수 있는것이죠. 당연히 그 정보와 함께 명예를 실추시킬수 있는 말이 첨부가 되어야 하구요.
또한 공연성이 뭔지 조금더 설명드리자면 이는 불특정 다수에게 전파가 되거나 전파될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철모르는 고딩이 함부로 깝치다가 신고먹고 벌금 내게 생겼네요

참고로 기소유예 집행유예도 기록에 남기때문에 불이익 직장잡을려면 상당히 큽니다

절때 만만히 볼께아닙니다^^  공연성을 띠고 특정 사람이나 집단을 전파가능성이 있는곳에서 비방하다니^^

차후 사과문기재 및 반성의 자세를 안보일시 명예훼손당사자에게 직접제보및 적극적으로 움직이겠습니다

역사에 대해서는 지가 믿는게 전지전능하다고 여기는 아마추어가 이런건 이렇게 모르고 남까대는건

참 잘하네요^^

참고로 역사란 모든 결론이 있는 답이 있는 학문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았던게 거짓이 되고 거짓이라 치부한게

진실이라 여길수있으며 사료말고도 금석문 벽화 유물 유적 문헌 비기등 종합적인 자료의 검증과 교차검증을 통해

하나씩 하나씩 가장 유력한 가설을 성립 결론을 내리는게 역사입니다 그러기때문에 하나의 역사적 사실에도

무수히 많은 가설이 있으며 어디서 배웠고 어떤것을 봤고에 따라 하나의 유물을 두고도 해석의 차이가 있을수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러한 많은 근거있고 타당성있는 가설들을 모아 그당시 사람들의 모습과 생활을 가장 근접하게 살펴볼수

있게 결론을 내리고 정립하는게 역사인으로써의 자세이구요

저런 철부지 저따위 정신못차리고 날뛰는 아마추어 고딩놈처럼 자신이 믿는것만 오직 진리이고 전지전능한것이

역사가 아니다 이겁니다 내의견이 옳고 내의견이 존중받길 원한다면 상대도 인정하고 배려하는 자세를 가져야지

저 고딩새끼한텐 이런게 아직 너무도 부족해보이네요 내가 진리고 답이고 딴사람은 모두 틀렸다? 이런 마인드

가지고 있는것같습니다

한번 크게 당해봐야 정신차릴꺼같네요 저런 악플러 개새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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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학 반도사관 사대사관에 찌든 우리사회 병적존재같은 아마추어들은

난독증도 있나봅니다 어디 제가 고소를 한다는 소리가 있을까요? 민원이 먼소린지도 모르나

명예훼손혐의로 고소는hyjoon 이 아마추어 고딩새끼가 철모르고 함부로 실명까지 거론해서

이곳에서 비방한 그사람만 할수있는거고 저는 좀더 인터넷공간 사이버명예훼손 정보통신법위반

혐의에 대해 좀더 열심히 수사해달라고 민원넣엇다 이소립니다 제발 쉴드도 글좀 제대로 다 읽고

치든 하세요 가소롭기만 하네요

그저 삼국사기나 몇줄읽고 그거가지고 앵무새마냥 읖어대면 쳐지끼면 좀똑똑해보이는줄 아는 아마추어들

세상에 역사란 학문이 이렇게 우스운학문이 됫나요?

역사학이란 학문을 공부도 안한 인간 아마추어새끼들도 논파 어쩌고 떠드는 세상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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